유학

3화: 이별과 성장 - 호치민 베트남 국제학교 입학

bobleesj 2025. 2. 17. 08:00

호치민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의 8월 여름 같다.
 
감사하다.
 
헤어드라이어 중간 단계로 젖은 머리를 말리는 느낌은 아니다.
 
에어컨을 가장 높은 온도로 틀어 놓고 업무를 보는 것 같다. 가만히 있으면 겨드랑이에 땀이 찬다. 짙은 색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은색 토요타 SUV 차량 한 대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조수석에서 내려 엄마, 여동생, 그리고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운전기사분도 계셨다. 아버지는 연간 100만톤이 넘는 목재 원재료 조달을 위해 베트남 구석구석을 다니셨다. 안전을 고려하여 회사는 대외업무를 위한 기사분을 지원해 주신 것이었다.

“삐이익”

 
4차선 도로와 그 위에 빨간색 신호등이 보인다. 1차선에는 하얀색 자동차가 줄지어 서있다. 마치 일렬로 정렬된 비엔나소시지처럼 말이다.
 
나머지 차선은 수십 대의 오토바이로 덮여있다. 마치 볶음밥에 들어가는 다진 야채처럼 말이다. 모두가 살짝 오토바이를 기울여 슬리퍼 또는 쪼리로 계란후라이가 가능한 아스팔트 바닥을 지탱하고 있었다.
 
신호등 색이 바뀌는 순간, 1차선에는 차량 후미등이 순차대로 꺼지며 앞으로 나아간다.
 
2차선부터 4차선은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아마추어 마라톤 경기 시작을 방불케 한다.
 
출발신호가 울리면 뒤에 있는 남성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부릉부릉 이리저리 오토바이 핸들을 휘저으면서 선두로 치고 나간다. 그들은 무리와 떨어져 각자의 페이스를 유지한다.
 
신도시 “푸미흥”에 도착했다. 베트남어 표기는 Phú Mỹ Hưng.

베트남어는 한국어처럼 한자문화권이다. 베트남어는 서구의 영향으로 라틴계 알파벳을 사용하여 표기한다. 성조가 총 6개다. 중국어보다 2개 더 많다. 알파벳 모음 위에는 물결 표시와 삿갓 모양 같이 한국인과 일본인이 애용하는 이모티콘 특수문자가 보인다.

 
푸미흥은 한자로 “富美興”. 부유하고, 미적이며, 흥하는 동네라는 뜻이다. 신도시 답게 하얀색 아파트가 콩나물처럼 들어서 있었다.
 
또한 베트남에서 가장 큰 한인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치킨집을 포함하여 음식점, 논술 학원, 심지어 당구장, 피시방, 스크린골프장까지…
 
다정한 한국어 간판이 우리를 반겨준다.

푸미흥은 1997년부터 개발되었다. 당시 외국인 거주 비율은 대략 40%였다고 한다. 미국과 영국 국제학교 외에도 일본, 대만, 한국, 캐나다 국제학교들이 운영되고 있다. 스타벅스, 버거킹 등 미국의 유명한 패스트푸드 체인점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학교를 가야 한다.
 
눈앞에 학교가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2차선 도로를 건너면 바로 학교 정문이다.
 
정문을 넘어서면 초록색 천연 잔디로 뒤덮인 축구장 2개가 보인다. 펼쳐진 최신 삼성 폴더폰처럼 가로로 붙여져 있다.
 
그 옆에 강이 흐른다. 강을 따라 10미터 간격으로 야자수 나무가 나란히 서있다. 코코넛 열매가 없는 종이라 파인애플처럼 생겼다. 무언가 떨어져 다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그늘에서 아이들은 목을 축인다.
 
페낭의 빨간색 학교처럼 미국계 국제학교였다.
 
당시 이 학교는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 사업가와 주재원 가족들로부터 가장 선망받는 학교였다.

졸업생들은 현지인을 포함하여 주로 미국과 캐나다로 대학을 진학했다.

국제학교를 포함하여 이러한 사립 고등학교를 간단하게 “(College) Prep school” 직역하자면 “(대학) 준비 학교”라고도  불린다.

 
국인 주재원 가족 자녀들은 높은 유학비용으로 인해 국내 대학을 주로 선호했다.

북미로 진학을 희망하는 경우, 국제 올림피아드 수상할 정도의 학생이 아닌 이상 장학금 기회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유학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미국의 공립대학 또는 캐나다로 대학을 갔다.

한국인 동기 중 절반 정도는 3년과 12년 해외 체류 특례 입시 과정을 통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전세계 어디에 살던 서울대는 서울대다. 영국과 미국 최상위권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성적을 지녀야 한다. 베트남 최상위권 국제학교에서 매년 한 명에서 두 명 정도 합격 하는 것을 보았다. 6살 어린 여동생은 영국계 입시에서 최상위 성적을 받았다. 서울대에 진학했다.

 
입학 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1층 하얀 빌딩에 들어갔다. 미군 출신 백인 여성분 그리고 한국인 여성 입학사정관이 일어나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나를 반겨주셨다.
 
입학시험이 없었다. 두꺼운 원서를 제출하고 터벅터벅 2차선 도로를 다시 건너 집에 돌아왔다.
 
이 학교는 따로 영어 ESL 수업을 운영하지 않았다.

사립학교 답게 학부모가 학교 발전에 의미있는 기여를 하지 않는 이상,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영어는 필수다.
 
며칠 뒤 아버지는 소식을 받으셨다. 별로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으셨다.

“대기자 명단”

 
당장의 거절은 맞지만, 불합격도 아닌 합격도 아닌 상태다.
 
이미 20명 한국인 학생이 대기중이라고 한다.
 
한 국적의 학생수가 전체 학생수 대비 20%가 넘으면 안 된다는 내부 규칙이 있었다.

국제학교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이뤄야 하므로 우리말로 티오 “TO” (Table of Organization) 가 여권의 색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푸미흥이 더욱 흥(興)할 수록 한국인 입학률이 흉흉해 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나의 이름 “Sangjoon (Bob) Lee”는 한국인을 위한 명단에 추가 되었다.
 
눈에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교정. 이게 바로 “그림의 떡”이 아닌가.
 
다른 학교를 찾아본다.
 
부유하고 아름답고 흥한 도시를 벗어난다. 다리를 건너 30분 차로 이동해야 한다. 
 
당시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학비를 자랑하는 국제학교에 도착했다. 

재벌과 공산당 최고위 간부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다. 고등학생 한 학생 등록금은 국내 중견기업 신입사원의 연봉과 비슷하다. 당시 베트남 일반인의 소득은 국내 소득에 비해 십분의 일 수준이었다.

 
신도시가 아니다. 아파트는 없었다. 학교 주변에는 복층 주택이 많았다. 당시 기억으로는 학교 주변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백인이 동양인보다 더 많았다.
 
정문을 지나면서 가로 약 40m 길이의 풋살 경기장이 보인다. 아스팔트 만큼 뜨거운 인조 잔디다.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며칠 뒤 바로 입학하게 되었다.

“쪼리는 금지.”

 
나는 하얀색 운동화를 신었다.
 
모래색 반바지는 짙은 청색으로, 빨간색 폴로는 하얀색으로 바뀌었다.
 
조금만 뛰어다녀도 손에 묻은 먼지로 인해 하얀색 옷이 금방 더러워졌다.
 
통학 방법 또한 바뀌었다.

먼저 베트남 도로 표지판에는 영어가 없다. 외국인이 “일방통행” 표지판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은 채로 골목길 또는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외국인이 운전한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기시된 그곳이었기에,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학교에 데려다 주시지 못하신다.
 
과거 하늘색 와이셔츠 교복 입을 때 처럼, 학교 차량이 아파트 경비실 앞으로 온다.

교회 차량처럼 마감이 둥그스름한 회색 버스가 찾아온다.
 
자리가 널널하다. 복도를 레드카펫처럼 당당하게 활보한다. 차 지붕에 머리가 닿을 듯하지만 몸이 꼿꼿이 펴져있다.
 
학교에 도착해 풋살 운동장을 지나면 지붕 없는 초록색 농구 코트가 나온다. 이 코트는 5층 정도의 하얀색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아이들은 점심 시간마다 초록색 코트위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오자마자 오렌지색 골대를 두 손으로 잡으며 운동신경을 과시했다. 

“덩덩 덜덜덜”


옆에 있는 1층 오피스에서 체육 선생님이시던 백인 여성분이 밖으로 나오셨다. 농구대를 잡지말라고 경고하신다. 그러고는,

“Come join the team.”

 
학교 농구팀에 들어오라고 하신다.
 
유럽에서 온 남자아이들이 전학생인 나를 경계한다. 체육 시간에 농구를 했다. 반칙과 몸을 써 나를 이기려고 한다.
 
매주 학교 선수들과 운동해 온 나는 그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친구 사귀는 것도 문제가 안된다. 땀 흘리며 운동하고 경기 중간 음료수 마시면 된다.
 
또한 학교 수업 방식이 바뀌었다.
 
빨간색 교복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이 애플의 아이패드를 구매하여 수업에 활용했다.

당시 아이패드 2가 출시되었음을 감안하면 기독교 학교이면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교육 정책을 펼쳤다.

 
하얀색 폴로 학교에서는 개인 노트북을 사용했다. 수학 수업에서조차도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다. 주로 교과서를 읽기 위함이다. (교과서는 “명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화학 수업이 기억난다.

남자 백인 선생님이 다리를 꼬고 앉은 상태로 원소의 핵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 역사를 장황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대학 교실처럼 책상 3열이 평행선처럼 되어 있다.
 
뒤에 있는 학생들은 마우스까지 사용하며 게임을 한다. 아이패드와 달리 노트북은 앞이 가려져 있어 학생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아이들의 입꼬리, 표정, 눈동자, 몸짓, 왼손의 키보드 위치, 그리고 오른손의 마우스 속도를 통해 대략 무엇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 선생님은 알면서도 무관심하다.

중간 열에 앉아 2013년 미국 프로 농구 파이널 중계를 보면서 레이 알렌 이라는 선수가 기적적인 외곽 3점 슛을 넣었을 때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이 하얀색 교복 학교에서 문제가 생긴다.
 
자극이 없다.
 
아무런 경쟁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부정적인 감정인 좌절감, 열등감, 상실감을 포함하여 말이다.
 
빨간색 교복을 입던 시절 경주마처럼 매일 같이 뛰고 집에 돌아와 다음날 수학 퀴즈와 성경 구절 암기하고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 경쟁하던 시절이 그립다.

함께 운동하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그리고 일본인 친구 2명은 미국 대학에서 수석 또는 수석에 가까운 성적을 유지했다. 현재 미국에서 말레이시아 친구는 4대 컨설팅 회계사로 일하고 있고, 일본인 친구는 공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또한 당시 운동을 하던 친구들과 내가 생각했던 “놀러 간다”의 개념이 달랐다.
 
빨간색 교복 아이들은 주말마다 티셔츠, 운동복 반바지, 쪼리 차림으로 친구들과 백화점 안에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점심 먹고 헤어진다. 가끔씩 배낭여행 관광객처럼 바닷길과 산을 타는 것이 주말을 잘 보낸 것이다.
 
하얀색 교복의 아이들은 초저녁에 만난다. 여자아이들은 화장을 진하게 하고, 남자아이들은 머리에 힘을 주고 긴 바지와 와이셔츠를 입는다. 전용 운전기사가 시내에 아이들을 투하한다. 이들은 빛나는 도시를 자유롭게 누빈다. 물론 학교 선생님도 종종 뵌다. 서로 손 흔들며 반갑게 인사한다.
 
새 학교로 전학을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학교 농구팀 주전 선수로 발탁되어 인기가 생겼다.
 
데이트 신청이 들어왔다.
 
검은색 BMW 시리즈7 차량이 학교 정문으로 온다. 상석 자리에 여학생이 있다. 친구가 창문을 내려 타라고 한다.
 
나를 모시고 어디론가 데려간다.
 
도착했다. 어두컴컴하다. 복숭아부터 다양한 과일향이 난다. 누군가 향초를 피우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서비스 직원이 커다란 유리병을 가져온다. 아래는 핸드볼처럼 둥그렇고 그 위는 단소처럼 길쭉하다. 길쭉한 유리병 옆에 고무호스가 있다.

“What’s that?”

 
바로 중동 국가에서 친한 친구와 가족끼리 모여 “물담배”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곳이다.
 
여기가 첫 데이트 장소라니.
 
주변을 보니 테이블 위에서 카드게임을 하는 학생들도 보였고, 남자아이들은 마치 심폐소생술을 할 것 처럼 고무호스를 통해 숨을 힘껏 들여마시고, 양파 튀김 모양의 농축한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더 아름다운 “도넛”을 만드는지 경쟁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있었다.
 
첫 번째, 나는 학생 운동 선수다. 폐활량이 중요하다.
 
두 번째, 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다. 종교를 떠나서 부모님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 앞에 섰을 때 떳떳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학교를 대표할 사람이다. 신임을 얻어 그들의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

말레이시아, 베트남, 미국을 포함하여 많은 한국인 유학생을 보았다. 나는 결코 누구한테 삿대질할 수 없다. 다만 후회를 줄이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 기준이 애매한 탈선의 유혹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 지난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영어를 정복하기 위해 오르막길을 달려왔다.
 
이제 보상이란 달콤함 유혹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한국에서도 취직 후 3년이 힘들다고 하지 않는가.
 
매주 몸이 근질근질하다. 
 
주말 한국 농구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다.
 
한국인 이성 친구를 사귀게 된다.
 
물론 빨간색 교복을 입을 때부터 친구들과 교제했다. 학교 앞 바닷가, 잔디, 그리고 리조트처럼 된 교정, 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학교 옆 수영장에서 주로 방과 후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나를 데리러 오셨다.
 
하얀색 교복의 학교는 천연잔디, 바닷가, 수영장이 없다. 학교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집에 온다. 지하 주차장에 있는 자전거를 끌고 비포장도로를 수많은 오토바이 사이를 뚫고 이 친구를 만나야 한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단 한 번이라도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해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공부를 놓게 된다.
 
자전거 뒤에 탄 친구와 함께 시원한 내리막길을 활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나의 휴대폰을 낚아 챈다.
 
통화 목록을 살핀다.
 
이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자세한 내용은 담기 어렵다.
 
본질적으로 서로 안 만나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대학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고민한다.
 
이제 몇 달 뒤면 고2다. 미국 입시에는 고3 내신이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미안해.”

 
이별을 선언한다.
 
나는 쪼리를 더 이상 신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색상과 모양을 고를 수 있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이 신발로 나만의 발자취를 만들어야 했다.
 
즉, 성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고2 당시는 아니였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중추적인 역할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부모님이야 말로 학창 시절을 겪으신 인생의 선생(先生)님이시다.

 
이 와중에도 아버지는 눈앞에 보이는 “그림의 떡”을 얻을 수 있도록 한국인 입학사정관에 매주 전화를 걸어 설득하고 계셨다.
 
그렇게 1학기 동안 아버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입학사정관은 백기를 들었다.
 
나는 베란다에서 보이는 그림 안에 있는 교정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국제학교의 대기자 명단이라는 것이 대학 수능 점수처럼 순번이 명확하게 나눠지기가 힘들다. 미국의 기업처럼 자리가 비면 가장 적합한 학생을 선발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생은 성인이 아님으로써 학부모는 사립학교 입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초중고를 3개 국가에서 다니면서 맹모삼천지교의 의미를 경험하게 되었다. 학부모는 자녀 학업 결과에 대한 책임보다 자녀가 성장할 수 있도록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엄청난 충격에 빠진다.
 
여름방학 SAT (미국 영어/수학 대학입학평가시험) 모의고사 시험을 봤다.
 
340점. 영어 읽기 성적이다.
 
경이로운 점수다.
 
총점이 800점이다.
 
전 세계에서 100명이 시험을 보면 93등 정도 된다.
 
미국 최상위권 학교에 합격하는 학생은 상위 1~2%의 점수를 얻는다.
 
방과 후 입시 학원에서 아이들은 영어 성적을 만드는 동안, 나는 코트와 운동장 위에서 경주말처럼 뛰어다녔다.
 
여름 방학 동안 아이들은 미적분을 선행하고 있을 동안, 나는 도서관에서 인문학 책을 읽고 아이들 농구를 가르쳤다.
 
나는 소위 “Prep school”이라는 불리는 이 대학 준비 학교에서 가장 준비가 안 된 학생 중 한 명이였다.
 
새로운 감정이 생긴다.
 
바로 압박감이다.

“아… 대학 가야 하는데.

 
압박감은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비롯된다.
 
나는 후회 없는 결과물을 만들기로 다짐한다.

이별까지 하지 않았는가.
 
3화를 마무리하며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시간이 1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의 고3시절을 어땠을까요? 운동을 포기할까요?

 

4화: 미국 사립대학 장학금 입학 (학부 2.9 학점으로 시작하여 스탠퍼드 공대 대학원 박사 합격까

나의 3번째 고등학교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하얀색 운동화, 짙은 청색 반바지는 그대로다. 하얀색 폴로는 하늘색으로 바뀌었다.  학교 수업 1교시 10분 전.“삐삑삐삑” 알람이 울린다.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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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당시 오토바이 풍경과 매우 흡사하다. 위 사진은 무료로 사용 가능한 unsplash.com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