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활 타오르는 열대야 나라에서 감히 더 이상 신을 수 없는 검은색 가죽 캔버스 신발을 신발장 안에 고이 보관했다.
납골당 속 유품처럼,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기 위함이다.
중학교 2학년, 15살. 그토록 동경하던 푸른 바다 앞이 보이는 학교에 입학했다.
나의 옷차림은 한결 가벼워졌다.
엄지발가락과 그 옆 발가락 사이만 살짝 햇빛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고무 쪼리(조리)를 신는다.
짙은 청색의 긴바지 대신, 남자 골프 선수가 자주 입을 법한 모래색 면 반바지를 입는다.
또한 다림질이 필요한 하늘색 반팔 와이셔츠를 옷장에 걸어두고, 땀 흡수가 잘 되는 빨간색 폴로셔츠를 입는다.
이제 쪼리와 반바지를 입고 축축한 모래 해변과 잔디밭을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다.
등교 방식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낡은 하얀색 봉고차가 아파트 경비실 앞으로 오면, 사탕에 홀린 아이처럼 스스로 차 문을 밀고 허리를 굽혀 차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새우처럼 허리를 굽인 상태로 눈을 굴려 빈자리 옆 아이들의 표정을 살핀다. 빈자리를 향해 몸을 돌려 엉덩이가 의자를 향하게 한다. 앞으로 맨 가방이 옆 아이들 얼굴, 몸에 닿지 않게 허벅지 근육에 강한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앉는다. 머리 뒤가 살짝 보이는 운전기사는 중립에서 1단 기어를 넣음과 동시에 악셀을 밟는다. 기어를 수동으로 바꿀 때마다 몸이 앞뒤로 쏠린다. 좌우 호주머니 옆, 살며시 손을 뻗는다. 안전띠는 없다.
봉고차 창문 밖, 출근 차량과 아스팔트 도로가 보인다.
빨간색 유니폼의 학교는 통학 버스를 운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대우의 “티코”를 운전하시며 아파트 단지가 아닌 동네를 돌아다니시며 방문 영어 수업을 하셨다.
운전이 편하고 중고차 가격이 잘 유지되는 “마이비”라는 말레이시아 어머니들의 국민차를 중고로 구매하셨다. 한국의 “모닝”과 비슷하다.
지하 주차장이 없다. 하얀색 아파트 앞에는 국민차답게 주로 하얀색 마이비가 수십 대가 전시장처럼 주차되어 있다. 그중 앞 창문 위에 부착된 학교 로고와 “학부모” 스티커를 통해 우리의 마이비를 1차로 판별한다. 차 문 잠금을 풀 때 나는 “삑삑” 소리로 2차 검증을 마무리한다.
나는 달려가 뒷 문을 열어 가방을 팽개친다. 뒷 문이 닫치기 전에 조수석 문을 연다. “퉁”, “텅”. 두터운 문짝 소리, 리듬감 살려 안전띠를 맨다. (영국계 도로 시스템이라 조수석이 왼쪽에 있다.)
문 살짝 닫아야지!
소리 크기에 따라 이미 머릿속에서 재생이 된다.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악셀을 밟는다. 소형차지만 1.3L의 4 기통 자동기어 차량이라 부드럽게 나간다. (기아의 모닝은 1.0L, 3 기통 엔진을 주로 사용하는 걸로 알고 있다.)
집과 학교가 바다 앞에 있어, 섬 외곽 국도를 따라 이동한다. 창문 밖은 아파트, 호텔, 그리고 푸른색 바다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학교에 도착했다.
1년 전 입학시험을 치렀던 그날의 모습이 마치 드라마처럼 내 눈 앞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직접 나와 어머니와 나에게 치아를 보이시며 반겨주신다.
말레이시아의 뜨거운 햇빛은 학생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주로 남자 선생님의 겨드랑이에 땀이 차, 그 부분만 짙은 색으로 변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학생과 선생님 모두에게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운동을 하지 않는 한, 운동화는 신지 않는다. 발의 열기를 식힐 뿐만 아니라 갑작스러운 소나기에도 쉽게 건조할 수 있도록 대부분 샌들을 신는다.
말레이시아의 빗방울 크기는 성인 새끼손톱만 하다. 빗방울이 얼굴을 강타하면 소형 우박에 맞은 것처럼 따갑다. 마치 총알이 방탄유리를 강타하는 것처럼, 빗방울 하나하나가 차의 앞문에서 터져 버린다. 차 지붕 위에서 누가 기관총을 쏘는 것 같다. 나는 귀마개를 쓰고 있다.
한 분의 복장은 예외였다. 40대 초반의 백인 남성은 긴 바지, 구두,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누가 봐도 “나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난다.
이분은 바로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다.
교장선생님은 문제가 있는 학생을 만나 정학, 부정행위를 처리하신다. 학부모를 대면하기 때문에 항상 옷을 단정히 입으신다.
새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나의 정체성에 한 획을 긋는 고유명사를 얻게되었다.
수련회에서 같은 학년 친구들과 점심을 우연스럽게 먹게 되었다.
한 명은 미국인 선교사 자녀, 다른 한 명은 테사라는 지리(Geography) 선생님의 자녀다.
테사가 갑자기 나의 이름을 물어본다.
“What’s your name?”
나는 한국식 발음으로,
“상준”
그러자 앞에 있는 여학생 두 명이 모두 같이,
“쎄에엥 주운?”
나는 다시,
“상”. “준”.
아이들은 “쎙”으로 발음한다. 한참 실랑이를 벌인다. 이는 마치 시장에서 웃으면서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물론 “S”와 “시옷”의 발음이 같을 수는 없다.
그때 테사가 갑자기 다른 합의점을 제시한다.
“Bob!”
점심을 먹다가 “밥”이 여기서 왜 나오는가. 다만 관심을 주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나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서 “밥”이 되었고, 모든 친구들은 나를 밥이라고 불렀다. 결국 선생님들도 나를 밥으로 부르기 시작하여 시험 또는 숙제에 불이익이 없도록 학생증 또한 “Sangjoon” 옆에 괄호치고 “Bob”을 넣게 되었다.
대학원 학생증 이름에 “Sangjoon”을 넣지 않아 “Bob Lee”가 되었다. 그래서 대학원 학생증에 “상준”은 표면에 없었다. 다만 박사 지원에 필요한 성적표를 확인하면서 시스템에 “Bob”만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부랴부랴 수정 요청을 했다. 지금도 추천서를 작성해 주신 교수님을 포함하여 모두가 나를 밥이라고 부른다. 다만 추천서만큼은 어색하지만 “Sangjoon” 으로 부탁드렸다.
수련회에서 돌아와 나는 “밥”이라는 학생이 되어 새 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영어를 못하던 당시, 내가 좋아하는 과목 두 개가 있었다.
첫 번째는 단연코 수학이다.
이 수업의 독특한 시험 방식은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매주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 선생님은 그 주에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쪽지시험을 만들어 나눠주셨다.
주로 빨리 시험을 끝낸 학생은 연필을 책상에 세게 내려놓는다. 시험지를 한 번 펄럭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검객이 칼을 사용 후 칼집에 넣는 것처럼 절도 있게 의자를 책상에 밀어 넣고, 열병식의 군인처럼 당당하게 뒷문을 향해 걸어간다.
빨간 플라스틱 박스에 시험지를 내려놓고 교실을 나가는 순간, 그 학생은 점심을 빨리 먹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누군가 일어나는 순간, 앉아 있는 학생들은 눈을 돌린다. 똑똑한 학생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대학은 주로 반대였다. 먼저 제출하는 이유는 고통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도 1학년 때 물리 기말고사에서 객관식 문제 대부분을 기도와 함께 푼 후, 시험장을 탈출하듯 나왔다.
나도 수학 시간만큼은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다섯 손가락 안에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의 일반적인 중학교 수학 과정은 한국의 일반적인 교과과정 대비 쉽다고 느꼈다. 미국 학생들은 공부 이외에도 과외활동, 운동, 병행하여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한국보다 발달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 이외의 시간을 할애한다. 예를 들어 뉴욕와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만 14살부터 부모님의 동의하에 합법적으로 취업이 가능하다. 미국의 과학고, 사립고, 경쟁이 치열한 공립고 학생들은 학교 정규 수업 외에도 일과를 직무처럼 분담하여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수업은 “성경”이다.
대학 진학에 필요한 필수 과목은 아니지만 성경은 나의 중학교 성적에 포함된다.
A를 받기 위해서는 단순했다. 매주 정해진 성경 구절 하나를 적어 종이 위에 써서 제출하면 된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받아쓰기”라는 전문 교육과정을 이미 받았던 상태다.
하루 전날 성경 구절을 외우고,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마이비 뒷자리 앉아 소리 내 달달 암기한다.
물론 종교라는 과목이 대학 성적에 반영되는 것을 모두가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 정규과정이 이러하니 해야만 한다. 오히려 영어를 못하는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다.
영어는 할 만했다. 일반 영어 수업을 듣지 않고 영어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따로 편성된 ESL (English Second Language) 과목을 들었다.
다만 ESL 과정에 속한 학생에게는 특혜가 주어진다.
학생들은 시험을 볼 때 정의가 주어지면 단어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정확한 단어를 유추해야 한다.
“동그랗고 빨간 과일은?”
ESL 학생들에게는 “사과”가 시험지 안에 주어진다. 머릿속이 아닌 “단어 은행”에서 찾아 베끼면 된다.
주변 학생들은 나를 못마땅하게 보는 눈빛이었다.
연민도 아닌, 부러움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 외, 학교생활은 영어로 인해 극심한 불안감을 겪게 된다.
첫 번째. 대표 기도다.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7명 정도의 학생과 선생님이 교실 뒤에 있는 소파와 카펫 바닥에 앉아서 서로 고민을 공유한다.
이 모임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우렁찬 대표 기도로 마무리가 된다.
일반적으로 국제학교는 그 나라에 발령된 미국 또는 영국계 교육을 희망하는 주재원 자녀를 위해 설립된다. 이 빨간색 교복 학교는 선교사의 자녀를 위한 학교로 설립되었다. 따라서, 학생들을 기독교라는 종교 아래에서 양육하는 것이 중점이다. 나의 친구들 주변에 선행 또는 따로 학교 외 과외를 한 학생을 본 적이 없다. SAT(미국 대학 입학을 위한 수학/영어 평가 시험)에서 일정 점수를 충족하면 대부분의 선생님과 선교사 자녀들은 미국의 기독교 기반 대학교로 진학한다.
나는 영어로 기도해본 적이 없다.
재빠르게 영어 기도의 패턴을 알아차린다.
Dear Heavenly Father … In the name of Jesus. Amen.
영어 기도는 한국어와 동일하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이 되고 그리고 끝맺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끝나는 것을 발견한다.
옆에 아이들은 국가와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 나는 건강하게 해 주세요. “Please be healthy.” 행복하게 해주세요. “Please be happy.” 맛있는 음식 감사합니다. “Thank you for good food”라고 매주 반복하여 기도한다.
시작과 마무리는 면접을 위해 외운 자기소개처럼 당당하게 말한다.
살며시 실눈을 떠 앞에 있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표정을 살핀다.
영어 말하기 트라우마는 지속된다.
특히 “Health”라는 보건 수업이 문제였다.
매 수업마다 교과서를 돌아가며 큰 소리로 문단 하나씩 읽어야 했다.
선생님이 읽을 첫 문단을 지정해 주는 순간, 나는 마치 관제탑의 레이더처럼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내 앞과 뒤에 몇 명이 있는지 확인한다. 그러고는 집게손가락으로 책을 헤집으며 읽어야 할 부분을 찾아낸다.
심장박동수가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빨라진다. 내가 읽어야 하는 문단 길와 박동수의 가속도는 비례한다.
어려운 영어 지문을 읽는 것처럼, 뇌는 정보를 인식하지만 해석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처럼 내 차례는 여지없이 찾아온다.
보건 수업은 인체의 장기 그리고 신체 부위부터 시작하여 모르는 단어들이 대부분이다.
들어보지도 못한 단어라 어느 모음을 강조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구수한 한국어 발음으로 높낮이 없이 모든 단어를 1차원적으로 소리 내어 읽는다.
마치 스님이 목탁을 치며 “나무아미타불”을 소리 내어 읽는 것처럼 말이다.
발음이 틀릴 때마다 옆에서 남자아이들이 키득키득 웃는다. 나는 주먹을 세게 움켜쥔 상태로 꾸역꾸역 읽는다.
문단이 끝에 가까워질수록 양쪽 귀가 더욱 뜨거워진다.
첫 학기 성적, 낮은 학점을 받았다.
일반적인 대학 입학을 꿈꾸는 학생들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학점이다.
미국 중고등학교에서 3.0 이하의 학점은 주로 대학 진학을 고려하지 않거나, 대학 운동 장학금을 목표로 하여 최소한의 졸업 요건을 충족하는 학생들이 받는 점수로 여겨진다. 심지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미국 프로 농구 선수가 된 코비 브라이언트의 고등학교 학점도 3.3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영어 때문이라는 것을.
성적은 숨기면 그만이다.
나의 영어 실력은 누구에게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어를 정복해야 한다.
나의 모든 전자기기는 영어로 기본 설정이 되었다. 마치 무슬림이 술과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처럼 한국어 사용을 금기시했다.
취침 시간을 제외하고 이미 주중에 14시간 이상을 영어라는 언어 속에서 보내고 있다.
나의 영어 실력은 청소년기 남자아이의 성장 속도와 같았다.
하지만 기하급수 곡선처럼 초반에 가속도가 붙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방귀대장 뿡뿡이] 수준의 영어 방송도 이해하지 못하던 듣기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어로 인해 교장실로 불려 가는 사건이 생긴다.
어느 날 ESL 영어 선생님께서 개인 사정으로 인해 학교에 못 오셨다.
40대 후반의 카고 반바지를 입고 있던 백인 남자 선생님이 대체 교사로 오셨다.
수업은 자습 시간으로 바뀌었다.
나는 친구와 떠들고 있었다. 선생님은 일어나 다가오셔서 타이르듯 몇 마디 하셨다. 물론 나는 선생님의 영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What?”
이라고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선생님은 다시 타이르듯이 몇 마디 더 하셨다. 영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반대로 돌리면서
“What?”
선생님은 “That’s it”라고 허공에 말한 뒤 바로 나를 교장실로 끌고 데려가셨다.
당시 왜 교장실로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터벅터벅 소리 없이 선생님과 함께 교실을 나와 교장실로 들어갔다.
옷을 차려입은 젊으신 교장선생님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속도의 미국식 영어 발음으로 반바지를 입으신 선생님과 인사를 주고받으셨다.
교장실은 법정이 되었다.
나는 교장선생님 책상 반대편의 피고인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은 일어선 채로 검사처럼 피고인의 잘못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결코 무죄임을 주장하며 “I didn’t understand.”라고 변론했고 어디서 주워들은 아이들의 표현인
“I really didn’t mean to.”
“일부러 하지 않았어요”라며 감정을 호소했다.
교장 선생님의 눈에서 빨간 레이저 광선이 나의 두 눈을 비췄다. 나는 마치 기싸움에서 진 강아지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쪼리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코끝이 찡하면서 소리 없이 모래색 반바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눈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모래색 반바지는 마치 물웅덩이에 돌이 떨어진 것처럼 갈색으로 변질되며 퍼져 나갔다.
이 투명한 눈물에는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와 “내가 왜 영어를 못해서...”라는 맑은 색소가 섞여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아무런 조치 없이 나를 혼내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 주셨다.
그렇게 나는 무죄를 선고받고 자유인이 되었다.
당시 나는 “What” 안에 반항의 의미가 있는지 몰랐다. 한국어로 의역하자면 “뭐라고요?”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마 “What” 대신 “Pardon”을 사용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살아있는 생물은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체온, 호르몬, 혈압, 등을 의식의 상관없이 우리 몸 안에 있는 DNA의 암호화된 공식대로 평형을 유지한다.
평형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생물의 몸은 흙덩이처럼 무기체로 돌아간다.
1년 동안 영어라는 칼을 갈며 새로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칼을 다루는 법을 몰랐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춤판이 깔리면 칼춤을 춰야 한다.
웃으면서 몸무림을 친다. 스스로를 매일 같이 베었고, 이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몸에 남겼다.
평형을 위해 외부로부터 수혈이 필요했다.
당시 모든 중학생은 밴드 과목을 들어야 한다. 학생들은 대부분 스스로 악기를 배우고 학교에서 관리되지 않아 녹이 슨 트럼펫, 플릇, 트럼본, 등을 빌려 사용했다.
말레이시아에 오기 전, 일 년 동안 교회 안에서 매주 플룻 개인 수업을 받았었고 부모님께서 학원비 두 달 정도의 비용을 들여 은색의 긴 플룻을 장만해 주셨다.
플룻은 주로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악기였다. 여학생 8명과 함께 지휘자 바로 앞에 앉았다.
영어 알파벳이 아니라, 악보를 읽었다. 혀를 굴려 영어 발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평평하게 맞대어 맑은 소리를 냈다.
보건 수업과 달리, 매주 나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색의 칼이 아닌, 플룻은 나의 마법의 은색 지팡이였다.
또한, 신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중학교 2학년, 늦은 나이에 농구를 접했다. 더운 날씨에도 축구와 달리 야외 농구코트는 지붕이 있어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모여서 하기 편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축구와 탁구를 통해 얻은 순발력을 이용하여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비웃는 친구들에게 신체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Left! Right! Ball! Ball! Ball!
문법도 필요 없고, 단어양도 제한적이다. 소리를 크게 지를 수 있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었다.
운동을 하다 보면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수업처럼 손을 들면서 다시 질문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마냥 앞 선수의 행적을 따라가면 된다.
체력 훈련 경우, 이를 악물고 가장 오래 버티거나, 또는 종착지에 먼저 도착하는 것 중 하나다.
초반에는 체력이 비슷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훈련일수록 신체적인 조건보다는 정신적으로 지치기 때문에 차이가 더욱 명확해진다.
나에게는 남들과 다른 목표가 있었다.
서투른 영어로 인해 그날 감정의 피를 많이 흘렸고 코치로부터 수혈을 받아야만 했다.
농구코트에서 모두가 일렬로 섰을 때, 호루라기가 울리면 반대편 골대 바닥을 짚고 돌아와야 한다.
나는 호루라기가 불리는 매 순간 생각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운동을 하다가 다치는 건 오히려 영광이다. 내일은 없다.
훈련이 지속될수록 몸은 숨이 넘어갈 듯 힘들지만, 그 순간 수혈을 받고 있었다.
운동유발성 천식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운동을 심하게 하다가 숨을 들이켜면 기침이 나온다. 다만 숨이 안 쉬어지지는 않는다. 기침이 심하게 나올 뿐이다.
상관없다. 그 시간만큼은 가장 빨리 목표물을 찍고 돌아오는 것만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경마장에 있는 말처럼 외부 시야는 차단되어 있다. 호루라기의 방아쇠가 당겨지면, 나는 달린다.
매일 2시간 방과 후 그리고 금요일은 밤 10시까지 학교 농구 코트에서 농구를 했다. 주말도 농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강풍과 소나기로 인해 야외 코트가 비에 젖으면 마를 때까지 기다리거나 혼자서 천천히 연습했다.
극단적인 노력은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전 학년에서 3명 중 한 명으로 고등학교 농구부에 선발되었다.
물론 주전은 아니다. 주로 벤치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Bench warmer”였다.
그해 농구부는 인구 80만 명이 거주하는 말레이시아 페낭섬 고등학교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후방십자인대 파열로 인해 재건 수술을 받고 1년 동안 재활을 했다. 재활 기간에도 대학교 농구팀에 들어갔으며, 지금도 매주 농구를 하고 있다.
농구이외에도 축구, 소프트볼, 배구를 포함하여, 공을 사용하는 모든 운동에 학교 대표 선수로 참가했다.
농구 골대 위에 손목을 댈 수 있을 정도로 높이 뛸 수 있게 되었다.
학교 배구 선수로서 스파이크할 때마다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1년 내내 평균 주말을 포함하여 주 20시간에서 25시간을 운동에 할애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성적은 학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영어 실력 또한 원어민 사이에서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피는 더 이상 흘리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수혈 받아 평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새로운 국가로 발령을 받으셨다.
구원투수 역할을 인정받아 새로운 해외 사업장 업무를 맡게 되신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으로.
배낭여행이 위주인 페낭섬에서 휴양지인 호치민이라는 육지의 도시로 떠나게 되었다.
빨간색 교복의 학교, 달랏 국제학교는 1929년 베트남에서 선교사 자녀를 위한 학교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1971년 페낭으로 터전을 옮겼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17살.
가고 싶은 국제학교 입학에 실패한다.
재벌과 정부 관료의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성적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게 된다.
2화를 마무리 하며
어떠한 유혹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3화: 이별과 성장 (학부 2.9 학점으로 시작하여 스탠퍼드 공대 대학원 박사 합격까지)
호치민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의 8월 여름 같다. 감사하다. 헤어드라이어 중간 단계로 젖은 머리를 말리는 느낌은 아니다. 에어컨을 가장 높은 온도로 틀어 놓고 업무를 보는 것 같다. 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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