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
나는 고등학교 시절 “물리”라는 교과 과정을 이수해 본 적이 없다. 선행 학습이나 예습 경험도 없었다. 오히려 나의 모든 학습 과정은 “후행”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나는 수학과 물리 외에도, 삶이라는 과정 속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결국 “스탠퍼드 박사과정 입학”이라는 또 다른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내가 마주했던 장애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1화는, 초등학교 졸업 후 가족과 함께 해외로 떠난 순간부터 시작된다.
1화: 탈옥을 위한 영어공부
내가 살던 동네의 대부분 학부모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아이들 교육에 열을 올리기 어려웠다. 따라서 주변의 초등학생들은 공부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남자아이들은 누가 게임이나 축구를 잘하는지, 또 누가 학교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는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초등학교 2학년, 이 동네로 전학을 왔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그런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9살인 나는 “다음 학기 반장 선거에 출마해서 어떻게 투표를 얻을까?”와 같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회사를 다니시면서 MBA 석사 과정을 병행하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의 책장에 꽂혀 있던 경영, 조직, 인사 관련 책들을 훑어보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초등학생이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한 조직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 나의 장래희망은 축구선수, 연예인이 아닌 영어의 약자도 모르는 “CEO”였다. 그래서인지 어른들로부터 “의젓하다”라는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모범생”에 가까운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6학년 때 반장을 맡고 있던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교사 휴게실로 부르시더니 학생들이 말을 도무지 듣지 않는다며 눈물을 보이시며 하소연하신 적도 있었다. 또한,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학교 대표로 구청장 표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치른 중학교 반 배치고사에서 반 차석으로 입학했다. 물론 학군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방과 후 어머니가 신뢰하는 공부방 선생님과 약 2시간 정도 꾸역꾸역 버티면, 나는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축구를 하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며 시간을 보냈다.
나의 자존감은 높았다. 오죽하면 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시던 아버지께서도 “교만하면 안 된다”라며 말씀하실 정도였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좋게 말하면 군계일학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교만했던 나의 삶은 아버지가 해외 주재원 발령을 받으시면서 송두리째 바뀌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회사의 해외 사업장은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경영적자에 빠졌다. 이에 아버지는 구원투수로서 경영 회생 프로젝트를 맡게 되셨다.
2009년 5월 9일. 한 달 동안 입었던 중학교 교복을 할머니 집 옷장에 고이 모셔 둔 채, 나는 여섯 살 아래 여동생, 어머니와 함께 동남아시아의 나라,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인구 80만 명의 섬이자 관광도시인 페낭은 한국의 한여름 땡볕이 1년 내내 지속되는 곳이었다. 마치 습식 사우나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불어도 시원하기는커녕, 마치 헤어드라이어 중간 단계로 젖은 머리를 말리는 듯한 뜨거운 바람이 스쳤다.
아버지는 동생과 나를 위해 근처 학교를 알아보셨다. 국제학교 학비는 일반 한국 대학교 등록금보다 2배에서 많게는 4배까지 비쌌다. 다행히 아버지의 회사에서 자녀 학비 대부분을 지원해 주셨다. 당시 주재원들이 선망하던 미국계 국제학교에 원서를 넣고, 영어 입학시험을 신청했다.
시험 당일, 차를 타고 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인도계 말레이시아인 경비원이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버지는 창문을 내리고, 아들이 영어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왔다고 설명했다. 경비원은 한참 동안 무전기로 교신한 후, 조심스럽게 정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차 앞문 위에 “방문자”라고 적힌 딱지를 붙였다.
정문을 지나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푸른 바다와 함께, 1층에서 2층 높이의 낮은 연갈색 학교 건물들이 펼쳐진다. 학생들은 바다 앞에 있는 학교 식당에서 파도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바닷가에서 뛰놀거나 맨발로 잔디밭을 뒹구는 학생들도 있다. 기숙사가 있어 학교 안은 늘 분주한 분위기다. 등교 시간마다 학교장과 선생님들이 직접 나와 차 문을 열어주고, 부모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학생이 차에 내려 교정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치아를 보이며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면서 아이들을 반겨준다.
나는 영어 시험을 보기 위해 입학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곧 내 이름이 불렸다. “Sangjoon.” 시험 중 유독 기억에 남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한 문장 안에서 “book” 의 뜻을 묻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책” 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예약” 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당시 나의 영어 실력은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정도에 불과했다.
시험이 끝났다. 아버지는 나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으셨는지 점수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아버지 또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른다. (결국 성인이 되어서야 점수를 알게 되었는데, 약 20점 정도였다고 하셨다. 시험은 객관식이었다.)
아버지도 영어 사용이 익숙하지 않으셨지만, 긴장이 섞인 웃음과 함께 입학 사정관에게 말씀하셨다.
“He is a very fast learner.”
“우리 아들 빨리 배워요.” 하지만 입학 사정관이었던 백인 여성의 대답은 단호했다.
“Your son, classmates, and teachers will be frustrated...”
아들뿐만 아니라, 주변 친구들과 선생님들까지 모두 절망할 것 이라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frustrated”라는 단어를 “낙담” 보다는 “절망”에 가깝게 받아들이셨다. 그 충격 때문인지, 지금도 이 일화를 자주 말씀하시곤 한다. 아버지에게는 이 단어가 깊은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끝까지 나의 영어 점수를 감추며, 내가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다. 또한, 다시 도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셨고, 매주 따뜻한 압박을 주며 나를 독려하셨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3개월 동안 성인을 대상으로 한 전문 영어 학원에 다녔다. 당시 나는 14살이었지만, 키가 약 170cm로 일반적인 말레이시아 성인 남성보다 컸다. 과정을 마친 후, 이제 학교에 다녀야 했다. 학비가 비교적 저렴하고 대부분이 현지 학생들로 구성된 영국계 국제학교에 입학시험을 보았다.
이 학교는 외부 차량의 출입을 별도로 확인하지 않았다. 바다도 없었고, 잔디는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뜨겁고 습한 이 나라에서 모든 학생은 검은색 신발을 신어야 했다. 음침한 방에서 시험을 봤다. 영어뿐만 아니라 과학과 수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과학 시험에서는 문제를 풀 때마다 속으로 기도하며 행운을 빌었다.
결국 합격했다. 아마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합격 통지를 받은 것 같다. 당시 이 학교는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최대한 많은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달랐다. 백인 영국인 교장은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얼굴을 찌푸린 채 수업에 집중하지 않거나 옷차림이 부적절한 학생들에게 큰소리로 훈계했다. 그는 턱을 치켜든 채 교실 창문을 통해 학생들을 감방 안의 수용자처럼 감시했다.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들조차 교장이 있는 곳에서만 조심했다. 마치 이동식 단속 카메라 구간에서만 속도를 줄이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서로 팔씨름을 하거나, 주먹으로 상대의 어깨와 팔꿈치가 만나는 지점을 치며 힘자랑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열을 가렸다.
이 모습은 내가 한 달 동안 다녔던 한국 남자 중학교 풍경과 매우 흡사했다. 정문 앞에서는 두발과 교복 검사가 이루어졌고, 지각한 학생들은 체벌을 받았다. 수업 중에는 선생님들이 집중하지 않거나 소란을 피우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체벌했다. 또한, 학생들 사이에서는 각 중학교에서 누가 가장 강한 주먹을 가졌는지 서열을 정하는 일이 흔했다.
학부모의 사랑과 관심 없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학교가 대신 아이를 훈육한다. 이 과정에서 선생님들은 아이들에 대한 기대와 존중을 잃어간다. 반대로, 학부모가 아이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 학교의 역할도 달라진다. 고등학교 진학과 대학 준비 등 사회에서 필요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부모님이 줄 수 없는 교육을 제공한다. 또한, 선생님들은 학생의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고민하며, 그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나는 이 학교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방과 후 활동으로 테니스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테니스장은 학교에서 봉고차를 타고 30분 정도 이동해야 하는 곳에 있었으며, 학교라는 보호 구역 밖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에는 나보다 세 살 많은, 유학 온 한국인 학생이 있었다.
테니스를 치던 중, 내가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학생은 갑자기 “따라와.” 라며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더니, 손바닥으로 내 뺨을 두 번 때렸다. 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을 때 이 친구는 무릎으로 내 허벅지를 가격했다.
당시 나는 중학교 1학년, 그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키는 나보다 작았지만, 몸무게는 족히 30kg 이상 더 나갔으며, 늘 다른 한국인 학생들과 몰려다녔다. 내가 힘으로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테니스를 마치고 돌아와 낮잠을 잤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가면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걸을 때마다 통증이 반복되었고, 이 신체적인 아픔은 하나도 빠짐없이 분노로 승화되었다. 분노의 감정은 걸음마다 더욱 농축되었다.
나는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학교에도 알리지 않았다.
대신, 나는 복수의 칼을 움켜쥐었다. 내 몸이 다 자란 후, 이 칼로 그를 반드시 응징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먼저, 이 칼을 복수가 아닌 탈출의 용도로 사용하기로 했다. 지금 나를 옭아매고 있는 이 하늘색 유니폼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내가 가야 할 학교의 새로운 빨간색 유니폼을 입기로 한 것이다. 또한 그곳의 학생들은 대부분 검은색 운동화가 아닌, 샌들이나 바다에서 신는 조리를 신고 다닌다. 이 검은색 족쇄를 스스로 잘라내야 한다.
나는 이 칼로 영어 입시 시험이라는 짚단을 단번에 베어 두 동강 내야 한다. 그리고 나를 거절했던 입학 심사위원에게, 성장한 내 모습을 당당히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이 칼을 담금질한다. 강도(strength)와 경도(hardness)를 높이기 위해서다. 지금은 무딘 칼이지만, 숫돌에 갈아 날을 세운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칼을 살살 손목으로 흔들어, 반사된 햇빛을 그의 얼굴에 비추어 눈이 부시게 할 것이다.
당시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어 실력 부족이라는 큰 죄값을 치르기 위해 감옥에 수용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영어를 못할 수밖에 없었다. 조기 유학 경험도 없고, 그저 일반적인 국내 초등학교에서 영어 교육을 받은 학생이 그 지역 최고의 국제학교에 어떻게 입학할 수 있었겠는가? 그 학교의 대부분 학생들은 원어민이거나, 어릴 때부터 억 단위의 학비를 들여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부터 국제학교를 다닌 아이들이었다. 영어는 그들에게 기본 장착된 능력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러나 이 개구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앞발과 뒷발의 천부적인 접착력을 이용해, 우물 벽을 타고 탈출을 시도하려 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 집 주변에는 손가락만 한 도마뱀들이 많았는데, 녀석들은 벽도 너무나 쉽게 타고 오르곤 했다.)
나는 이 칼을 갈면서,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이 천국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감 넘치는 선생님과 학생들의 얼굴을 보며, 그들을 동경했다.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그는 매일 성경책을 교도소 독방에 반입해, 그 안에 숨긴 작은 숟가락으로 벽을 뚫었다. 포스터로 가려진 벽 뒤에서 묵묵히 탈출로를 만들었고, 마침내 하수도를 통해 자유를 얻었다. 그는 단 한 명의 재소자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루 2시간씩,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방문 원어민 선생님과 영어를 공부했다. 매일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면서도, 꾸준히 영어 공부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학교를 무단 결석했다. 그 시간, 나는 아파트 1층의 작은 공용 공부방에 홀로 앉아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나의 탈출을 위한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부모님께서는 다시 거액의 입학 시험 비용을 지불하셨다. 나는 다시 영어 입학시험을 치렀다.
합격. 탈옥에 성공했다.
학교는 1년 동안의 나의 영어 실력 성장을 인정해 주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확인한 입학사정관들이 결국 나를 뽑아주었다.
하지만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합격한 거야.”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 나는 깨닫는다.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가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경제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운을 기반으로, 내 개인적인 노력을 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테니스 코트에서 나의 뺨과 허벅지를 가격했던 그 학생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나는 이 칼을 쓰레기통에 버리기로 했다. 오히려 손수 펜으로 편지를 써서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나에게 탈출이라는 목표를 간접적으로 만들어 주었고, 결국 나의 영어 실력을 급격히 성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준 친구였다.
중학교 2학년. 그토록 동경하던 학교에 입학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복수심이 사그라지는 대신, 또 다른 부정적인 감정이 나의 정신과 몸을 휘둘렀다.
열등감.
나는 이곳에서 가장 영어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학년 전체에서 공부를 가장 못하는, 소위 꼴찌가 되어버렸다.
1화를 마무리 하며
2화에서는 새로운 국제학교에서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과연 나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2화: 피로 물든 영어 극복 - 말레이시아 국제학교 적응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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